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인류 최초의 여성인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트집 잡은 한 경찰서장이 어느 날 한 목사님을 방문해서 다짜고짜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도둑 아닙니까? 어째서 남자가 자고 있는데 허락도 없이 갈비뼈 하나를 훔쳐가서는 요물 스러운 여자를 만들어 놓습니까?" 이를 듣고 있던 목사님의 딸이 대화에 끼어들며 참견을 했습니다. “서장님, 서장님의 부하 한 사람을 빌려주십시오. 좀 곤란한 문제가 있어서 조사를 했으면 합니다.” “그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그 곤란한 문제가 무엇인가?” “사실은 어젯밤에 제 방에 도둑이 들어와 돈을 훔쳐갔습니다. 그런데 그 도둑은 돈을 훔쳐간 대신 훨씬 값비싼 보석 상자를 두고 갔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요.” “호, 그것 참 부럽기도 한 이야기인데? 그런 도둑이라면 우리 집에도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목사님의 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실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은 아담의 몸에 일어났던 경우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갈비뼈 한 개를 훔쳐 가셨지만 그의 곁에 자신의 살 중에 살이요 뼈 중에 뼈인 여자라는 보석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은혜를 입었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은혜란 도저히 값을 매길 수 없이 귀중한 것이지만 아무 조건 없이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말합니다. 헨리 나우엔의 말처럼, 거의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일정한 가치에 따라 판단 받게 됩니다. 고용주들은 기술과 지식으로 우리를 판단합니다. 은행과 점포에서는 신용에 따라 우리를 대우합니다. 심지어 친구들도 자신과 공통된 관심이라는 기초 위에서 우리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가정에서는 단 한 가지 요소만 중요하다. 그가 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아들의 지능지수가 90밖에 안된다고 다른 집 아이와 맞바꾸려는 부모는 없습니다. 딸이 학교 축구팀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의절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세상 전체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가정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한 가정에서는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이 오갑니다. 선천적으로 기형아로 태어난 아들이나 다운증후군에 걸린 딸도,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몹쓸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자식도, 어떤 스포츠 스타나 장학금 수혜자 못지않은 사랑과 애정을 받으며 살아갈 자격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은혜란 조건 없는 사랑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도무지 사랑스러운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대상에게 고귀한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의 행위인 것입니다. 세계적인 탕자였던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는 사랑스럽지 않은 자를 사랑하심으로써 나를 사랑스러운 자로 만들어주셨다”고 그의 “참회록”을 통해 고백했습니다.
가정 안에 바로 이 ‘은혜’의 요소, ‘은혜’의 법칙이 자리 잡게 될 때 가정은 작은 천국이 되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기초한 가족관계는 법이나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뢰와 은혜와 용서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들은 강요나 명령보다 자발성과 순종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갑니다. 불평하기보다 감사하며 희생이 요구될 때는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먼저 복종시킬 줄 압니다. 무엇보다 은혜의 가족관계에는 끊임없이 칭찬과 격려가 있어 자존감을 높여줍니다. 그래서 내가 존재하는 절대적 의미를, 힘들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 내야 하는 삶의 의미를 깨우침 받는 곳이 가정인 것입니다.
가정 천국을 이루며 살아가는 가족 구성원들에게는 이런 “은혜의 법칙”이 자리 잡게 됩니다.그들은 굉장한 사건에서보다 일상 속(해맑은 아이의 눈동자, 감미로운 대화, 대화가 있는 저녁식탁, 막 피어오르는 꽃송이)에서 더 많은 은혜를 체험하며 삽니다. 그들은 까다로운 규칙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틀에 지배받지 않고 사랑의 법 아래서 자유를 누립니다. 그들은 과거의 상처들이나 과오들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반짝거리는 두 눈을 미래에 고정시켜 삽니다. 그들은 나를 슬프게 했던 환경과 나를 배신했던 친구들은 잊고 삽니다. 하지만 나를 기쁘게 했던 일과 끝까지 나와 함께 했던 친구들은 오래오래 기억하며 그들 곁에 살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사랑하기 ‘때문에’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