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아가서(Song of Songs)는 남녀 간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노래한 책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과 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대단히 사실적이고 때로는 육감적이며 선정적이기까지 하여 강단에서 설교하기가 쉽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66권의 정경(Canon)속에 당당히 포함된 이유는 그 사랑이야기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하신 주님의 위대한 사랑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가의 두 주인공은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고 술람미 여인은 성도(교회)의 모형입니다. 술람미는 얼굴도 삶의 배경도 결코 별 볼일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볼품없는 가난한 한 농가의 농사 짖는 처녀에 불가했습니다. 어느 날 술람미가 살고 있는 이 농촌 마을에 솔로몬 왕이 찾아왔습니다.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을 보고 한 눈에 반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하여 왕궁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결혼과 가정의 울타리를 허무는 여우가 있었습니다. 왕궁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일상에 취해있는 신부 술람미 여인은 신랑인 솔로몬 왕의 사랑에 안일함과 지체함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에 사랑의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서로 사랑하므로 천국 행복을 누려야 할 가정이 광야와 같은 거친 들로 변했습니다. 때대로 우리의 가정에도 교회에도 주님과의 관계에도 거친 들과 같은 황량함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파경입니다. 그러나 이기고 견디어 내면 천국이 됩니다.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은 서로를 향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고 이 위기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그렇게도 사랑하는 신랑인 솔로몬 왕을 대동하고 천덕꾸러기처럼 살았던 자신의 고향집으로 돌아옵니다.
아가서 8:5절을 보면 마을로 들어오는 이 두 남녀를 보고 마을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놀라운 표정으로 노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랑하는 임에게 몸을 기대고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또한 현대인의 성경은 “사랑하는 임의 팔을 끼고 사막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좀 더 사실적이고 깊이 있게 묵상해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솔로몬 왕을 만나기 전의 술람미 여인은 결코 놀라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여인이 누구냐고 놀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몸을 기대고 있는 사람 때문입니다. 팔짱을 끼고 이 여인 곁에 서 있는 한 남자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솔로몬 왕입니다. 자신들이 결코 관심도 갖지 않았던, 미운오리새끼 취급했던 이 여인 곁에 일국의 왕이 서 있습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그 듬직한 어께에 몸을 기대게 하고, 그 뜨거운 가슴에 이 여인을 감싸 안은 채 서 있습니다. 아마도 술람미 여인을 잘 알고 있던 다른 여인들은 놀라움과 부러움의 눈으로 이 장면을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저 얘, 남자 한 사람 잘 만나서 팔자 고쳤네!”
이렇게 팔자 고친사람은 술람미 여인뿐만이 아닙니다. 뭍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부러워하게 만든 사람은 이 여인뿐만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신랑으로 우리에게 보내 주신 예수 그리그도의 신부가 된 사람들 모두가 술람미 여인처럼 팔자 고친 사람들이고 부러움의 대상들입니다. 이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바로 그런 대상인 것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나에게 어께를 내밀고 내 곁에 서 계신 나의 신랑 되신 예수님은 이렇게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입니다. 그분은 도장(seal)같이 가슴에 자신의 분신이나 되는 것처럼 나를 품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사랑해 주시는 분입니다(8:6). 죽음으로도 지옥으로도 불로도 홍수로도 끌 수 없는 죽음같이 강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입니다(8:6). 그분의 사랑은 이 세상 모든 것과 바꾼다 해도 허락할 수 없는, 결코 자신의 신부인 나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8:7).
이 사랑의 두 주인공은 지금 막 ‘거친 들’에서 올라왔습니다. 우리 신랑이신 주님에게 있어서 거친 들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무섭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음도 견디어 내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요한복음 3:16) 죽음보다 더 강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절대적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신랑 되신 우리 주님의 그 절대적 사랑의 대상인 성도에게 있어서의 ‘거친 들’은 신랑의 사랑을 의심하고 방황한 세상 유혹과 시험과 죄 된 삶일 수 있습니다. 이 거친 들에서 어떻게 올라 올 수 있습니까? 술람미 여인처럼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 도장 같이 가슴에 품는 사랑, 그 어떤 것으로도 이길 수 없는 죽음같이 강한 사랑, 그 어떤 대가를 지불한다 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사랑, 이 사랑을 확인할 때 이 ‘거친 들’을 견디고 이기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그 분의 거친 들이었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험한 십자가를 외면하지 아니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은 삭풍을 맞으며 그 황량한 거친 들에 외롭게 홀로 눈물지으며 앉아 있는 나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며 손 내밀어 일으켜 세우시고 그 큰 사랑의 손으로 감싸 안아 모든 사람들의 놀라움과 부러움의 대상으로 우리를 우뚝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험한 십자가의 죽음을 다 이기고 견디어 내신 우리 주님의 그 가슴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을 백만분지 일이라고 느끼며 이 ‘고난주간’을 보내기를 소망하며,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날인 ‘부활주일’을 환희와 기쁨으로 맞이할 것을 기대하며.....!